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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프,웨딩21] 엘리너 루스벨트와 힐러리 클린턴의 내조 스토리(1)

웨딩21뉴스_ 2009. 4. 7. 15:25

출처 : 결혼준비 웨프 http://www.wef.co.kr

 

뛰어난 정치적 판단과 군중을 아우르는 리더십으로 미국 퍼스트레이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엘리너 루스벨트. 단순한 내조를 넘어 남편의 정치생명을 구해낸‘헌신적 내조’스토리를 소개한다.

 

 

 

 

 소아마비남편의 다리 역할을 해낸 정치적 동반자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9세기 뉴욕 사회의 최상류층으로아무나 끼어들 수 없는 집안에서태어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엘리너 루스벨트는 5촌 사이로 엘리너가 18살 때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1905년 3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프랭클린의 외도로 둘 사이 애정이 무너지고 엘리너는 독립을 선언한다.
 
프랭클린의 정치적 성공과 그동안의 애정, 존경심으로 이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기 두 사람은 정치에서 안전한 공통 관심사를 발견하게 된다.
 
엘리너는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고 겸손이라는 훌륭한 미덕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주택공급과 미성년자 노동법, 선거인 등록, 산아 제한 등의 문제에 열중하기 시작하자 프랭클린은 감탄과 감사를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열정이나 친밀감이 아닌 공동의 가치와 상호 필요성에 기반을 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갔고 시간이 흐르면서 둘 사이를 차츰 다시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1921년 여름, 차가운 바닷물에 빠진 프랭클린이 소아마비로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되자 엘리너는 그의 커다란 몸을 일으키고, 누이고, 목욕시키고, 주물러주며 남편이 남은 반평생을 환자로 살지 않게 하기 위해 정계로 되돌릴 것을 결심한다.

그런 그에게 엘리너는‘눈과 귀와 다리’가 되었고 이를 디딤 삼아 프랭클린은 뛰어난 전략가가 될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정계 복귀를 위해 뉴욕 주를 사방으로 누비고 외치며 유세장과 방송 전파에도 친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편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아내의 첫 번째 역할은 동료고 다음은 어머니와 주부라고 늘 말해왔다.
 
그는 결국 정계 복귀에 성공했으며, 1933년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하기에 이른다. 엘리너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성공했다. 시대가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CNN 방송망이 전국 방방곡곡에 깔리기 오래전에 엘리너는 신문을 교묘하게 이용해 전국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녀는 논쟁 요인들을 온화하고 차분하게 감싸 안는 한편, 날카로운 비판을 흡수하여 대통령에게 나쁜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1940년에는 전국적인 전당대회에서 연설하는 최초의 퍼스트레이디가 되기에 이른다.
 
비록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할 수는 없었지만 활달하고 자신만만한 루스벨트의 정신과, 겸손과 활력을 두루 갖춘 엘리너의 개성은 미국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두 가지 위기에서 구해냈다.

후임 대통령들과 퍼스트레이디들이 모두 루스벨트 부부를 기준으로 자신들을 평가했을 정도니 말이다. 독립적 퍼스트레이디의 역할 모델로 오늘날 부유한 미국을 있게 한 엘리너 루스벨트. 실제로 엘리너와 프랭클린의 정체성과 국가에 대한 공헌도는 빌 클린턴과 힐러리보다 훨씬 더 독특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2009.6.12(금)~14(일) SETEC(서울무역전시관) 3호선 학여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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